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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시조가 되다


단군왕검/마니산·정족산성

개요

단군왕검은 우리 민족이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또한 ‘홍익인간’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단군왕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시조이다. 단군 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신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 아사 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 〈삼국유사〉는 단군에 대해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내려온 후 사람이 되길 바라는 곰이 시련을 잘 견디고 웅녀가 되자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단군왕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군왕검에서 ‘단군’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인 종교 지배자를 뜻하고, ‘왕 검’은 정치를 주관하는 정치적 지도자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정치적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 지배자가 같은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다.

해설사

스토리

작은 자연석을 지름 8.7m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각 변을 6.6m로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돼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 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삼랑성 三郞城 은 정족산 鼎足山 에 있어 정족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 길이는 2,944m에 달하며 자연석으로 축조된 성이다. 삼랑성은 다섯 개의 봉우리를 타고 넘는 포곡식 산성으로,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마니산

에피소드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개천대제 開天大祭 가 열리고 있다. 전국 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타오르는 성화는 지난 1953년부터 마니산에서 채화되고 있다. 칠선녀가 태양열을 이용해 채화한 후 행사장까지 봉송하고 있으며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했다.

정족산성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전화번호 032-937-0125(전등사) 

이용요금 어른 3,000원 / 청소년, 군인 2,000원 / 어린이 1,000원(전등사 입장료)


시가 되어 살다


이규보/이규보 묘

개요

이규보는 고려시대의 문신·문인. 명문장가로 그가 지은 시풍 詩風 은 당대를 풍미했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 陳情表 로써 격퇴하기도 하였다. 저서에 <동국이 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동명왕편 東明王篇 〉등이 있다.

해설사

스토리

이규보의 자는 춘경 春卿 , 호는 백운거사 白雲居士 , 시호는 문순 文順 이다. 이규보는 명종 20년 1191 진사과에 급제했지만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개성의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거기서 〈천마산시〉 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은 민족의 영웅이자 고구려의 건국자인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 한국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를 쓰기로 유명했고 시, 거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 三酷好先生 이라 불리었다. 특히 시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는데 그의 작품 <시벽>를 보면 시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 지가 잘 드러난다. 또 평소 술을 좋아해 술을 마시지 않고는 시를 지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술에다가 극존칭인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여 <국선생전>이라는 가전체 문학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최씨 무인 정권에 협조하여 권신의 압객 狎客 , 기회주의자이란 말도 들었 으나 기개가 있고 성격이 강직해서 조정에서는 인중룡 人中龍 이란 평도 있었다.

이규보는 그가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한 강화도에 묻혔다. 근처에는 이규 보의 사당이 있다. 묘는 실제로 보았을 때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석인상과 동물상이 묘를 지키고 있으며, 뒤로는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규보

에피소드

이규보는 죽기 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장경이 완성되는 것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74세를 일기로 강화에서 영면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상반된다. 한편에선 시대의 문인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시대의 아부꾼이라 불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규보 묘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


짧은 생의 왕으로 남다


철종/철종 외가

개요

철종은 조선의 제25대 왕이자 대한제국 추존황제이다. 추존 군주 장조의황제사도장헌세자 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그 뒤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해설사

스토리

본명은 원범이며, 변이라는 이름은 그가 왕위에 즉위한 후에 개명했다. 상계군 사건과 송마리아, 신마리아 사건의 영향과 은언군의 서자라는 점 때문에 생부 이광은 왕족으로 작위를 받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생활하다가 만년에 석방되어 한성으로 오게 되었다.

철종은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헌종의 뒤를 이어 1849 년 19세로 즉위했으나 재위기간 14년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했고 민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철종은 국왕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강화도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강화군 선원면에 위치한 철종 외가는 철종이 즉위한지 4년 후인 1853년에 지어진 철종의 외삼촌 염보길의 집이다. 강화에 유배되었던 시절 철종이 도움을 받았던 외가를 위해 철종 잠저인 용흥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경기지역 사대부 저택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가 좌우에 있는 창덕궁 후원 연경당과 비슷한 형태인 H형 구조를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 행랑채 일부가 헐려 ㄷ자형을 하고 있다.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다소 폐가 같은 느낌이 들지만 건축 연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당시로는꽤 규모 있는 저택으로 만들어진 가옥이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철종

에피소드

철종은 강화도에서 양민으로 살 때 한 천민 처녀를 만나게 된다. 그는 혼인을 맺고 사랑을 이어가 지만, 천민 출신의 그녀는 궁녀조차 될 수 없는 신분이었으므로 철종을 따라 궁궐에 들어올 수 없었다. 철종은 그녀를 매우 사랑해서 상사병을 앓았다. 왕이 그녀를 잊지 못하자 왕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은밀하게 죽여버린다. 철종이 비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을 사랑 하는 연인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철종 외가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미군의 공세에 분투하다


어재연/어재연 수자기

개요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자는 성우, 본관은 함종이다. 1866년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광성진을 수비했다. 1871년 신미양 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어재연을 순무중군에 임명하여 광성진을 수비케 하였다. 이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미군에게 패했고 동생 어재순과 함께 미 해병 제임스 도허티의 총검에 찔려 전사하였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해설사

스토리

조선 후기의 무관이며, 시호는 충장 忠壯 이다. 고종 1년 1864 에 장단부사를 거쳐 1866년에 공충도 公忠道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로즈 Rose 제독이 강화 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했다. 이후 회령부사로 부임하였다가 고종 8년 1871 2월에 도총관·금위영 중군에 임명되 었다.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삼군부 三軍府 에서 순무 중군 巡撫中軍 으로 추천하여 강화도에 급파되었다.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그는 6월 11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의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했다. 수륙양면작전을 전개 하는 미군을 맞아 야포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해서는 끝까지 물러 서지 않고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했다.

신미양요에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광성보가 함락 되었지만,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 명의 조선군이 모두 전사하는 치열하고 끈질긴 저항에 미군은 전사 3명, 부상자 10명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하고도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전투를 끝내고 미군은 어재연 장군의 대장기였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갔다. 수자기는 진중이나 영문의 뜰에 세워진 대장의 군기를 말한다. 즉 1871년 신미양요 때 왕명으로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 장군의 대장기로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 帥 ’자가 적혀 있어 ‘수자기’로 불렸다. 수자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해 왔다가 문화재청과 해군의 노력으로 2007 년 10월 22일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 현재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 중이 다. 수자기의 크기는 가로 415cm, 세로 435cm로 재질은 삼베다. 수자기의 오른쪽엔 미군이 승전을 기념해 군기 일부를 잘라낸 흔적이 있다.

어재연

수자기

에피소드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깃발인 수장기가 136년 만에 국내에 들어왔 다. 우리나라는 역사적 비극이 서려 있는 장군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했으나 관련 법 개정과 미국 의회 통과 없이 반환이 힘들다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와 협의한 끝에 2년 계약(최장 10년까지 계약 연장 가능)의 장기 대여 방식으로 장군기를 들여왔다.


근대의 역사를 대표하다


백범 김구/김구선생 방문 고택(대명헌)

개요

김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종교인, 교육자,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 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해설사

스토리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에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였다.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황해도 출신의 그가 강화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강화읍 남문에서 시내 방향으로 100여 미터쯤 가다 보면 1928년에 건축된 일제강점기의 한옥이 눈에 띈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다고 하여 ‘김구 고택’, ‘1928 고택’으로도 불린다. 영국식 해링본 마룻바닥, 크리스털 유리창에 새긴 장미문양, 문마다 전시된 옛 그림 등 곳곳에서 개화기의 문화 충돌이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또 전통한옥에 일본식 유리 창문이 독특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900년 25세의 청년 김구는 2월 어느 날 지인을 만날 생각으로 강도남문 강화읍 남산리 소재 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온다. 몇 년 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김주경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미 김주경은 가산을 모두 날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뒤라 동생인 김진경의 집에 머물며 아동 30여 명을 모아 석 달간 서당을 운영했다. 그후 김구는 1947년 강화도를 다시 방문해 이 고택에서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해방 전 공식적으로 상하이 上海 에 있다던 김구 선생은 수차례 이 고택을 찾아와 사랑방에 머물며 누마루에서 독립투사들과 회의를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화가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전통화를 그릴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독립투사들의 정신과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자국의 뿌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의 기반이 되었던 셈이다.

김구선생 방문 고택 에피소드

고택의 안방 툇마루 밑에는 성인 네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공간이 있다고 한다. 독립투사들이 일본 순사에게 쫓기면 이곳에 숨겨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고택 곳곳에는 숨겨진 지하 공간들이 많이 있다고. 높이가 사람 키 정도 된다고 한다. 지금은 땔감을 쌓아놓는 공간이나 부엌의 일부, 또 장독대 저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구선생 방문 고택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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