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10선 평화역사이야기
인천강화 문화관광


강화해협의 평화를 지키다


광성보

개요

강화 해안의 12진보 중 하나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였다. 고려가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강화외성을 쌓았고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았다. 이후 효종 9년 1658 에 광성보가 처음 으로 설치되었다.

해설사

스토리

김포와 마주 보고 있는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중 하나로서 갑곶 돈대, 덕진진, 초지진과 더불어 강화도 동부해안에 있는 4대 전쟁역사 유적 지이다. 특히 광성보는 해안 요새로는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모두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중 신미양요는 치열한 전투로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고종 때인 1871 년에 통상을 요구하며 미국 군함이 침입하자 초지진, 덕진진, 덕포진 등에 있던 조선군 포대가 이를 물리쳤는데 미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공격해 초지 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까지 쳐들어왔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 장군과 조선의 군사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무기를 들고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 신미양요 전투에서 수백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고 중상을 입은 수십 명이 미군의 포로가 됐다.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어재순 장군을 기리는 쌍충비각과 당시 전사자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이 있다. 1970년대에 이곳을 다시 정비해 산책로와 잔디밭, 용두돈대, 포대 등을 만들어 놓았다.

광성보는 안해루 옆의 포대 그리고 안해루 뒤쪽의 넓은 잔디밭, 또 용두돈대 까지 이어지는 소나무숲길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또 용두돈대까지의 산책로도 산책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용두돈대는 강화의 다른 돈대와는 달리 강화해협으로 돌출된 모양의 포대이다. 용두돈대에 서면 양쪽으로 강화해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설치된 용두돈대에서는 우리나라에서두 번째로 물살이 빠르다고 알려진 손돌목의 물길을 마주할 수 있다. 물이 많이 빠져 그 위세는 약해졌지만 물살이 강할 때는 안해루에서도 물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광성보

특징

파괴된 문루와 돈대는 1976년에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도 보수 정비했다. 피비 린내 났던 광성보 전투의 기억은 시간 속으로 흩어져 흔적만 남아있다. 안해루를 지나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걸으면 울창한 소나무 숲과 시원한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광성보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전화번호 032-930-7070

이용시간 09:00~18:00

이용요금 어른 1,100원 / 청소년·군인 700원 / 어린이 700원


강력히 강화를 수호하다


덕진진

개요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 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덕포진을 동진 지금의 김포시 대곶면

으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덕진진을 설치했다.

해설사

스토리

초지대교를 건너 초지진에서 시작해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나아가다 보면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 사적 제226호 덕진진과 만난다. 덕진진은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든 내성-외성-돈 대-진보 등의 12진보 중 하나이다. 조선 숙종 1679 에 축조되었다.

돈대의 형태만으로 본다면 덕진진은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안요새라 할수 있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이곳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이때 이곳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1976년 강화전적지 정화사 업으로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다.

덕진진은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하는등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현재 덕진진에는 남장포대, 덕진돈대, 덕진진 경고비 등이 남아있다. 남장포대는 건립 당시 15 문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반달 모양으로 축조된 것이 독특하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공조루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덕진진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덕진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남장포대를 만난다. 해안을 향해 낮은 흙담을 쌓고그 긴 흙담의 중간 중간에 포를 놓은 형태로 김포의 덕포진과 비슷하다. 강화 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졌던 남장 포대에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했다. 강화에는 8개의 포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옛모습대로 복원된 곳은 남장포대뿐이다.

남장포대의 남쪽 끝 언덕 위에 덕진포대가 있다. 포대에서 내려다보는 강화해협의 풍광이 시원해 한번 올라가 볼만한 곳이다. 덕진진은 현재 사적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진진

에피소드

덕진진 경고비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경고비 우측에 남은 총탄의 흔적이 죽음을 각오하고 조국을 지켜내고자 애썼던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일깨워준다.

덕진진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진로 34

전화번호 032-930-7074

이용시간 09:00~18:00

이용요금 어른 700원 / 청소년·군인 500원 / 어린이 500원


강화의 호국정신을 전시하다


강화전쟁박물관

개요

강화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의 고비 때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호국의 거점이었다. 강화전쟁박물관은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015년 4월 개관했으며 선사시대, 고려, 조선, 근현대 시대의 전쟁관련 유물을 강화도에 초점을 맞춰 전시해 놓았다.

해설사

스토리

강화 갑곶돈대 내에 자리 잡은 강화전쟁박물관은 2015년 4월 옛 강화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해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역사의 고비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박물관은 총 4개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제1실 주제관 에는 선사시대에 사용했던 돌도끼와 돌화살촉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의 청동 칼, 갑옷 등 무기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전시물이 가득하다.

제2실에선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제작 과정을볼 수 있다. 성을 축조하는 장면을 ‘디오라마’로 재현했으며 모형물을 통해 고려와 몽골 장수의 신체 외형을 비교할 수 있다.

제3실은 조선시대에 발생한 외침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에서 사용했던 활과 조총, 패월도 같은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유물 가운데에는 1871년 신미양요 때 약탈된 이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2006년 강화군으로 돌아온 수자기가 눈에 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 함대에 맞서 광성보에서 군사 600여 명을 지휘했던 어재연 장군이 이 깃발을 들고 전투를 벌였다.

제4실에서는 근·현대 무기를 살펴볼 수 있다. 대한제국 장교가 착용한 군도와 노끈에 불을 붙여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의 항일 의병 화승총과 화승식 권총, 소포 등을 볼 수 있다. 6·25전쟁에서 사용한 무기도 상당수 있다.

또한 관람객에게 흥미로운 전쟁관련 역사정보전달을 위해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복합영상, 실물모형, 디오라마 등도 설치했다.

강화전쟁

박물관

특징

강화전쟁박물관은 2015년 4월 옛 강화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해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연면적 924m 2 ,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상설전시실은 총 4개실이다. 제1전시실은 주제관과 선사·삼국 시대, 제2전시실은 고려 시대, 제3전시실은 조선 시대, 제4전시실은 근현대로 강화의 역사를 시대별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밖에 항일의병 가상체험 코너과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강화전쟁박물관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 18

전화번호 032-930-7076

이용시간 09:00~18:00

이용요금 갑곶돈대 입장료에 포함(어른 900원 / 청소년·군인 600원 / 어린이 600원)


작은 규모로 외적을 막다


갑곶돈대

개요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설치된 소규모 관측·방어시설로 강화에만 53개에 이른다. 갑곶돈대는 1679년에 완성됐는데 1977년 보수·복원작업이 이뤄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돈대 안에 있는 대포는 조선시대 말에 설치된 것으로 외세의 침략에 맞선 선조들의 얼이 깃들어 있다.

해설사

스토리

강화대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강화도의 첫 유적지 갑곶돈대를 만날 수 있다.

갑곶돈대는 초지진, 광성보처럼 요새라는 명칭을 얻지 못하고 단지 돈대(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다. 갑곶돈대는 규모가 크지 않지만 육지와 가까워 돌출형 구릉에 위치하여 강화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편,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골 과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으며, 대포 8문이 배치됐다.

‘갑곶’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전해온다.

또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 다는 말에서 유래됐다는 전설도 있다.

인조 15년(1637)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조선 정부가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했다. 이후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는 데, 그중 하나가 갑곶돈대다. 실제로 갑곶돈대가 완성된 건 숙종 5년(1679) 5월 이다. 그리고 고종 12년(1875) 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이후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 있었고, 1976년에 복원했다. 오늘날에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불랑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춘 ‘소포’, ‘대포’ 등이 복원돼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오른쪽에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류달영 박사를 비롯한 우리 문화유산 보존에 뜻을 모은 이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 뒤편에는 강화의 각 지역에 흩여져 있던 67기의 비석을 모아 관리 중이다. 금표 비와 하마비, 어떤 사실을 기록한 영세불망비와 사적비 등이 있다.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석인 금표는 숙종 29년(1703) 강화유수부 앞 등지에 세웠던 것으로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갑곶돈대

에피소드

갑곶돈대에서 가장 유서 깊은 유물이라면 탱자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강화도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적을 막는 기본적인 수단으로 성을 쌓아야 했고 탱자나무는 성을 튼튼히 해주는 보강 재료로 널리 쓰였다. 사방을 둘러 높은 성벽을 쌓고 해자(垓字)라 하여 깊은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웠는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성 아래에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 가시 울타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손가락 길이만한 험상궂은 가시가 사방으로 빈틈없이 내밀고 있어서 특별한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탱자나무 가시를 뚫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이 녹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성을 탱자성이란 뜻으로 지성(枳城)이라 하였다.

갑곶돈대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 18

전화번호 032-930-7077

이용시간 09:00~18:00 연중무휴 이용요금 어른 900원 / 청소년·군인 600원 / 어린이 600원


강화도만의 맛을 선보이다


강화풍물시장

개요

강화버스터미널 가까이에 있는 전통시장이다. 2007년 강화민속장 명소화 사업으로 신축한 2층 건물 상설시장으로 1층에는 풍물장, 회센터가 있고, 2층에는 풍물장과 식당이 있다. 보통의 전통시장처럼 농산품, 해산물, 말린 생선, 김치, 젓갈 등 반찬거리와 농기구, 각종 잡화가 시장 손님과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풍물시장이라는 이름답게 강화 특산품인 강화순무, 밴댕이 젓갈, 강화 인삼, 화문석 등도 볼 수 있다.

해설사

스토리

강화풍물시장은 강화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2007년 강화 민속장 명소화사업을 통해 현재의 건물이 신축되었으며, 현재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되었다.

강화도의 다양한 특산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강화풍물시장은 상가건물 형태의 상설시장으로 매월 2일, 7일로 끝나는 날에는 전통 오일장이 열려 더욱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로 가득하다.

강화풍물시장 1층에는 속노랑고구마, 사자발약쑥 등 제철 농산물과 강화도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숭어, 꽃게 등 제철 수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또한 강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순무김치와 새우젓 등 다양한 젓갈이 판매 되고 있다.

시장을 둘러보다 출출해지면 2층 식당가에서 밴댕이회무침부터 순댓국, 화덕피자까지 다양한 음식을 입맛에 맞춰 골라먹을 수 있다. 특히 밴댕이회무 침에 곁들이는 강화인삼막걸리 한잔도 강화풍물시장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 이다. 2층 식당과 연결되어 있는 건물에는 화문석, 화방석, 왕골 공예품 등 강화도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특산품이 판매되고 있다.

매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열리는 전통 오일장에는 시골에서 직접 농사 지은 제철 농산물과 시골 장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주전부리 등 볼거리, 살거리, 먹거리가 다양하다. 풍물시장 옆에 위치한 강화인삼센터에서는 강화도 6년근 인삼부터 다양한 인삼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정이 넘치는 시골 시장 풍경이 그립다면 강화도 여행에서 강화풍물시장을 들러봐야 한다.

강화

풍물시장

특징

풍물시장 공터와 도로변에 300여 개의 좌판 시장이 열린다.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는 노점에는 각종 나물류와 땅콩, 호두 등 견과류와 각종 채소 등 없는 것을 빼놓고 다 있을 정도다. 시장 1층에는 풍물장, 회센터가 있어 가격 흥정하는 재미와 싱싱한 회를 즐길 수 있고, 2층에는 풍물장과 식당이 있어 강화 여행길에 배고픔을 잊게 해 줄 맛난 먹거리와 볼거리가 있다.

강화풍물시장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중앙로 17-9

전화번호 032-930-7042

이용시간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 휴무

주차요금 유료


고려의 결기가 새겨지다


고려궁지

개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부터 다시 환도하는 1270년까지 39년 동안의 고려궁궐 터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를 완공했다.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해설사

스토리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에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후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이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옛날 고려인들이 13세기에 세계 최강의 몽골 군대와 결사 항전을 벌였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강화에 고려왕궁이 들어선 건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긴 12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곳을 지은 이는 최우라고 전한다.

고종은 이곳을 37년간 사용했다. 연경궁, 강안전, 경령궁 등 규모는 작지만 궁궐의 모습을 갖췄고 뒷산의 이름도 개경처럼 송악으로 불렀다.

고려왕조는 1270년 몽골과 화친조약을 맺으며 강화도를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때 몽골이 ‘강화도에 있는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해서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역사적 유물이 거의 파괴됐고 지금은 왕궁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폐허가 된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왕의 행차 때 사용하던 행궁과 동헌·외규 장각 등이 들어섰지만 이마저도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다불타 없어졌거나 약탈당했다. 현재는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 이방청 등이 남아 있다. 1964년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전적지정 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조선의 보물창고로 불렸던 외규장각도 2003년 복원되었다.

에피소드

최근 고려궁지가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이는 고려궁궐의 복원이나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어서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이곳에 행궁 行宮 과 외규장각을 지어 보관했던 왕실의 문서들을 1866년 11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에게 약탈당한 지 145년 만인 2011년 5월 의궤 儀軌 297권을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의궤란 의식과 궤범을 합친 말로서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남긴 보고서이다.

고려궁지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전화번호 032-930-7078

이용시간 09:00~18:00

이용요금 어른 900원 / 청소년·군인 600원 / 어린이 600원


철종의 과거가 머물다


용흥궁

개요

조선의 25대 왕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던 집인 용흥궁은 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다. 원래 보통의 초가집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후 보수하고 이름을 궁으로 고쳐 불렀다. 용흥궁은 팔작지붕집이며 공포를 지붕 위에만 배열한 주심포양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철종이 살았던 집임을 알리는 비석과 비각 등이 있다.

해설사

스토리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은 14세부터 왕위에 오르게 되는 19세까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집안이 역모에 몰렸기 때문인데, 죄인이 왕에 등극한 것은 고려와 조선역사를 통틀어 유일하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는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 용흥궁이 남아있다. 잠저는 새로 나라를 세우거나 반정으로 임금에 추대된 왕족, 임금이 아들을 두지 못해 종실에서 왕위를 잇도록 추대한 왕족 등이 임금이 되기 전 궁궐 바깥에 살던 민가를 일컫는다. 보통 임금이 된후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잠저를 다시 지어 용흥궁처럼 궁으로 승격시켰다.

철종은 기와집인 지금의 용흥궁이 아닌 초가집에서 형제, 친척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용흥궁은 철종이 즉위하고 4년이 지난 1853년 강화유수 정기 세가 기존 초가집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다.

‘용흥궁’이라는 현판 아래 있는 대문을 통과하면 행랑채를 마주하고 안채가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사랑채가 있으며, 사랑채의 오른편 계단을 올라가면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경기지방 한옥에서 볼 수 있는 ‘ㄱ자형’이다. 기와지붕 구성물 중 하나인 처마도리는 음양오행에 따라 사랑채는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안채는 땅을 상징해 네모나게 처리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 八 자 모양인 팔작 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다.

용흥궁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강화도령을 왕으로 모셔 가기 위해 많은 관리들과 군사들이 배를 타고 강화도로 넘어오고 있었다. 초가에서 이를 지켜본 강화도령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인 줄 알고 인근 산으로 줄행랑쳤다고 한다.

용흥궁

특징

용흥궁은 임금의 집인 까닭에 건축 이후 다른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살았 다는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사대부 살림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양반’이 머무는 사랑 채가 나오고 ‘안주인’이 있는 안채를 사랑채 뒤편에 배치한다. 그러나 용흥궁은 사랑채를 안채 뒤편 구릉 위에 지은 특이한 구조다. 왕이 머무는 사랑채의 권위와 전망을 고려해 언덕 위에 배치한 것이다. 각 방에 딸린 툇마루가 적다는 점에서도 용흥궁이 사람이 살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흥궁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 21번길 16-1

이용시간 09:00~18:00

이용요금 무료


서양 사상으로 동양을 짓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개요

전통 한옥 구조에 서양 건축양식이 가미된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동양 건축과 서양 사상의 만남으로 유명하다.

해설사

스토리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얼핏 사찰처럼 보인다. 한옥의 건축양식을 따라 지어 졌기 때문이다. 이는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현지의 전통과 문화를 수용한다는 성공회 방침에 따른 것이다.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의 주도로 1900년에 완공됐으며 조마가 Mark Trollope 주교가 설계하고 감독했는데, 직접 신의주에 가서 백두산 적송을 골라 뗏목을 서해에 띄워 강화까지 운반했다고 전해진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성공회가 조선인 선교를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성공회 첫 세례교인이자 첫 조선인 사제로 서품을 받은 김희준 신부는 강화도 주민이었다.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위해 초가집을 구입해 성당으로 사용했는데 교인이 18명으로 늘어나자 공간이 비좁아졌다. 학교·병원·교회 역할을 하던 초가집 성당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새롭게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나선다. 강화읍에 부지를 마련하고 사찰과 비슷해 보이는 한옥식 건축 양식을 사용한 것이다. 이후 성공회는 강화성당 건축을 시작 으로, 1936년까지 한옥식 예배당 건축을 이어 갔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입구에 큼지막한 범종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종에는 성공회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성당은 입구 계단, 외삼문, 내삼 문, 성당, 사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덕과 함께 보면 마치 범선처럼 보이 는데, 성당이 자리 잡은 곳이 섬이고 교인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것을 고려하여 성당도 배를 본 뜬 모양으로 설계되었다고 전해진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달려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한옥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실내 공간은 서구 바실리카 양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제대 및 세례대는 201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흰 돌로 만든 커다란 비석 같은 세례대가 있고 여기에는 수기, 세심, 거악, 작선 등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으 며, 악을 떨쳐 선을 행한다’라는 뜻이다. 100년이 넘은 성당은 아직도 예배당 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입구에는 교인 세례명이 적힌 카드가 책장 가득 꽂혀 있다. 성당과 같은 시기 지어진 사제관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사제관 역시 한옥 양식 건물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에피소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종교사 및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27번길 10

전화번호 032-934-6171

이용시간 10:00~18:00

이용요금 무료


청동기의 한 면이 보존되다


강화부근리지석묘

개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 시대를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전형적인 북방식 형태를 보여준다. 또한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 선사시대의 문화와 기술,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해설사

스토리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성행하여 초기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 巨石文化

의 일종으로 청동기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이다. 농업생산과 인구 증가로 인해 지배계층이 등장하는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오롯이 보여주기 때문 이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고, 죽음을 대하는 선사인 들의 잠재의식까지 담겨있다. 또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자 신전 같은 의미로도 파악된다.

고인돌공원이 조성된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강화지석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인돌 중 하나로 전형적인 북방식 모습을 담고 있다.

전체 높이는 2.6m,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의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다. 무게는 약 108t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석재를 옮겨 축조하기 위해서는 최소 1,000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돼야 하는 것으로 분석되므로 선사시대에 강화도를 매우 막강한 힘으로 지배했던 부족장의 무덤이라고 전문 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해발 약 30m 높이의 능선 위에 세워진 강화지석묘는 흙으로 바닥을 수십 층다진 뒤 받침돌 지석 을 좌우에 세우고 안쪽 끝에 판석을 세워 묘실을 만들어 사체를 넣은 다음 판석을 막아 무덤을 만들었다. 동서장축의 고임돌이 잘 남아 있고, 그중에서도 서쪽 고임돌이 양호하다. 하지만 두 끝의 마감돌은 없어진 상태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5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6.4m, 높이 2.5m의 우리나라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 돌의 평균 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강화부근리지석묘

특징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수량이 전 세계적으로 많다. 강화도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고인돌의 흐름과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 고인돌은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형식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강화부근리지석묘 찾아가기

주 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 전화번호 032-933-3624

이용시간 상시 개방 이용요금 무료



2021 평화역사이야기여행택시 ┃ 인천 강화

상호 ┃ 2021 여행택시 운영사무국 (주)에스에이치네스크
대표 ┃  박승하 / 사업자등록번호 ┃  271-81-48256
주소 ┃  서울시 성동구 성동구 아차산로 15길 52, 405호

연락처 ┃  02-458-3315
이메일 ┃  shnesque@naver.com


Copyright ⓒ 2021 평화역사이야기여행택시 
All rights reserved


2021 평화역사이야기여행택시 ┃ 인천 강화 

상호 ┃ 2021 여행택시 운영사무국 (주)에스에이치네스크
대표 ┃  박승하  /  사업자등록번호 ┃  217-81-48256
주소 ┃  서울시 성동구 성동구 아차산로 15길 52, 405호

연락처 ┃  02-458-3315  /  이메일 ┃  shnesque@naver.com
Copyright ⓒ 2021 평화역사이야기여행택시 All rights reserved